올해 백수(白壽)를 맞은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자신의 행복론을 담은 새 책 <행복예습>을 펴냈다. 이 책에는 이런 문구가 씌어 있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더 큰 행복을 안겨준다.’ 천재 시인 윤동주와 한 반에서 동문수학했던 김 교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에게 ‘행복’이란 무엇인지 직접 들어봤다.

"내가 즐겁고 사회적으로 보람을 느끼는 게 행복 입니다.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살기에 행복한 사회가 돼야 나도 행복합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사람은 모름지기 더불어 살아야 행복하다”고 말했다.

“결국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해주는 것이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는 그랬기에 행복했습니다. 사랑을 나누세요.”

김 교수는 1920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아흔아홉, 그러니까 백수(白壽)다. 백수라고 할 때 흰 백 자를 쓰는데, 일백 백(百)에서 가로 획 한 일(一)을 빼면 99이고, 그럼 흰 백(白) 자가 돼 99세를 백수라고 한다.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윤동주 시인과 한반에서 공부한 그는 그 시절의 윤 시인을 ‘병아리 시인’이라고 불렀다.


# 타고난 능력보다 큰 결실 거둬야 ‘성공’

2년 전 그가 펴낸 책 <백년을 살아보니>는 출판 불황에도 15만 권이 팔렸다. 지난해 연간 165회의 강연을 소화한 그는 필자를 만난 날도 저녁에 강연이 잡혀 있다고 했다. 한때 ‘구구팔팔이삼사(9988234)’라는 말이 회자됐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 앓고 3일째 죽는 게 좋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는 그야말로 99세까지 88하게 살고 있다. 나이 80까지는 늙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8월 15일엔 <행복예습>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담은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 이렇게 썼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행복이 머문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더 큰 행복을 안겨준다.’ 그는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은 해봤자 행복하지도 않고 남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스스로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나눠 주는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할줄 알아요. 성공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에요. 성공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이 아닙니다. 타고난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결실을 거두는 게 성공입니다. 90%의 가능성을 타고났는데 70%에 머물면 실패한 사람이죠.”

- 인생의 황금기는 60~75세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60세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나이입니다. 나를 믿어야 행복합니다. 이 시기는 또 자녀가 독립하고, 사회적으로는 정년을 맞아 직업인으로서의 삶이 끝나고 사회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이예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바르게 살았다면 지도자가 될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죠.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엔 열매가 익어갑니다. 직업인으로서의 삶이 끝나 화려한 꽃은 떨어졌지만 이렇게 익은 열매가 이 사회를 위해 떨어지는 것도 괜찮습니다.”

- 지하철 경로석에서 노인들이 서로 ‘민증(주민등록증)’을 깔 뻔한 사태를 목격한 일이 있습니다. 노추(老醜)에 빠지지 않고 곱게 나이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본에서 대학에 다닐 때 식당에서 웨이터를 했습니다. 요즘 말로 ‘알바’죠. 인격을 갖춘 손님은 학생복을 입은 알바생을 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야 이거 가져와, 저거 가져와’ 했죠. 그때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야 존경받는다는 것을. 늙어서 젊은이에게서 존경을 받지 못하면 버림을 받습니다.”

“99세까지 살 줄 알았으면 재혼했을 것”

그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기사에게 “고맙습니다”, “덕분에 잘 왔습니다”, “더운데 수고하시네요” 등의 감사 말을 건넨다. 아들딸과 저녁에 외식을 하다 시간이 길어지면 식당 직원에게 다가가 “우리 때문에 늦도록 수고한다”고 인사를 한다.

“손주들에게 모범을 보이겠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 건 ‘당신의 수고로 내가 행복하다’는 마음을 전해 자신이 종사하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어요. 자기 일에 자부심을 못 느끼면 평생 불행해할 수도 있습니다.”

- 나이 들면 생활 자체가 운동을 동반하는 습관이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아흔이 넘으면 운동이 생활이 되고, 생활이 운동이 돼야 합니다. 집에서 앉아만 있지 않고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식이죠. 나는 2층의 내 방을 하루에도 몇십 번 오르내립니다. 1km 정도는 걷는 게 습관이 돼 힘들지 않아요. 나이 들면 운동이 생활 습관이 돼야 합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고혈압, 당뇨병 징후가 있더라도 40, 50대부터 잘 관리하면 80대 중반까지는 괜찮은 거 같더라고 말했다.

"장수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40, 50대부터 건강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이에요.”

김 교수는 우리나라 철학계 1세대 교육자다.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나왔고,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철학의 사회적 가치는 무엇일까? 그는 “철학을 인문학으로 확장할 수 있는데 다른 학문과 달리 이른바 문·사·철을 아우르는 인문학은 일절 구속을 받지 않아 자유롭고, 그렇기에 창조력의 원천이다”라고 말했다.

“인문적 소양을 갖춰야 큰 인물이 됩니다. 미국이 강대국이 된 것도 인문적 사고를 하는 지도자들이 미국을 이끌면서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을 창조해왔기 때문이죠. 철학을 공부하면 나이 오십쯤 됐을 때 나의 철학, 곧 나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할수 있습니다.”

80분간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여러 사람을 거명했다. 고령에도 이들의 이름을 줄소환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그는 “항상 문제의식을 갖고 살다 보면 기억력을 유지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의 문제의식이 다른 문제의식으로 이어지는 거죠. 관련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서 고유명사를 가장 먼저 잊어 버린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게 동사입니다. 그래서 집 전화번호는 잊어버려도 배가 아프다는 말은 할 수 있죠.”

그는 이 나이까지 살게 될 줄 알았다면 재혼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김 교수의 부인 김옥수 씨는 20년 넘게 병석에 있다 1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병중에 있을 때 어머니가 유언처럼 ‘다 떠나고 나면 결국 혼자 남을 텐데 빈집에서 혼자서 어떡하느냐’고 하셨는데 그게 재혼하라는 이야기였어요. 나이가 아흔쯤 되면 친구도 거의 없습니다.”

“건강에 자신감 생긴 건 50세 이후”

그는 여든넷에 상처한 후 아흔이 될 때까지 6년만더 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100세 시대라지만 80대 중반이면 대개 혼자가 됩니다. 그런 후배나 제자들에게 될 수 있으면 재혼을 하든, 연애를 하든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 살라고 권합니다. 더 살아봤자 내가 얼마나 살겠다고 하는 생각에 나는 실패했지만.”

1970~80년대 그와 함께 철학계 삼총사로 불린 안병욱 숭실대 교수, 김태길 서울대 교수는 아흔을 전후해 세상을 떠났다.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동갑이다.

“나 혼자 남아 지금도 일을 하고 있죠. 두 사람은 나보다 건강이 좋았어요. 안 선생이 생전에 나더러 ‘김 선생은 정신력이 강해 우리보다 오래 살고 일을 많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신력이란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이야기한 거죠.”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건강이 안 좋았다고 한다. 그의 건강 문제는 부모의 걱정거리였다. 더욱이 가정 형편도 안 좋았다. 하루는 아버지가 친구인 의사에게 그를 데려갔다. 의사는 그가 몸이 약해서 중학교에 못 간다고 말했다. 철없는 나이였지만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 매달렸다. ‘중학교에 가게 해주시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기도했다. 그가 건강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50세가 넘어서였다고 말했다.

“50대 후반에 수영을 시작해 지금도 지속적으로 합니다. 수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건강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수영은 관절에 좋고 전신운동 이라 몸의 균형을 잡아주죠. 수영 덕에 아직 관절에 문제가 없어 지팡이를 짚지 않는데 내년엔 짚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 자녀를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아들 둘이 다 외국에서 대학을 나왔어요. 결혼시키고 2년씩 같이 살았습니다. 결혼했다고 바로 분가시키면 정이 없는 거 같고, 그렇다고 오래 데리고 있으면 고부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등 어려워집니다. 2년씩만 같이 살았기에 자식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는 먼저 간 두 친구 안병욱·김태길 교수가 도산 (안창호)이나 인촌(김성수) 선생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강연을 다니다 보면 ‘안병욱 선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나한테 해요. 그렇게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겨레와 나라 걱정한 두 사람 잠들다’

그는 80세가 돼서야 1년 정도 일을 쉬었다. 막상 쉬어보니 노는 게 더 힘들더라고 했다.

- ‘버킷 리스트’가 뭡니까?

“지금 하는 집필과 강연을 죽을 때까지 하는 겁니다. 사랑이 있는 수고와 봉사를 하다 오래 앓지 않고 가고 싶어요.”

그가, 아흔을 넘기면 신체적으로는 피곤하다고 말했다. 하루하루를 환자처럼 살아간다고 했다.

“시력과 청력이 감퇴하고 균형감각도 떨어집니다. 피곤함을 일로 극복하는 거죠.”

그에게 묘비명을 어떻게 새기고 싶은지 물었다.

“안병욱 선생이 강원도 양구에 누워 있습니다. 나도 나중에 거기로 갈 거고요. 우리 둘을 위한 묘비를 내가 마련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묘비엔 ‘여기 겨레와 나라를 항상 걱정한 두 사람이 잠들다. 이름은 잊어지더라도 이들의 마음은 남을 것이다’라고 쓰고.”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카페를 나섰다. 41년 전 대학 신입생 때 나는 그의 철학 강의를 들었다. 내리막길을 걸어 횡단보도에 이르렀다. 녹색 신호등의 숫자가 빨간색으로 바뀌기까지 20초가 채 남지 않았다고 알려줬다. 그를 따라 길을 건너는데 걸음 속도가 젊은 사람 못지않다. “집에서 2층에 있는 방으로 오르는 계단을 하루에도 몇십 번씩 오르 내린다”고 한 그의 말이 생각났다. 돌아서서 가는 노 교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배웅했다.
 

<글 : 이필재 / 인물스토리 텔러>

이필재 인물스토리 텔러는 30여년 이상 국내ㆍ외 저명한 인사를 인터뷰한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터뷰 전문가 중 한명입니다.

저작권자 © 자투리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