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상식도 지식이다①] 전화 한통이 대한청년의 꽃을 피우다
[자투리상식도 지식이다①] 전화 한통이 대한청년의 꽃을 피우다
  • [자투리경제=박용문 SNS에디터]
  • 승인 2019.08.08 17:0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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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재   아이콘_김구   acrylic, rice on canvas   100x100cm   2014이동재는 1974년 서울 출생으로 동국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쌀이나 콩, 팥과 같은 곡물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적인 인물을 표현한 곡물회화작업으로 주목받아 왔다.
이동재 아이콘_김구 acrylic, rice on canvas 100x100cm 2014
이동재는 1974년 서울 출생으로 동국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쌀이나 콩, 팥과 같은 곡물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적인 인물을 표현한 곡물회화작업으로 주목받아 왔다.

 

백범 김 구 선생
백범 김 구 선생

 

화장실에서, 지하철에서, 혼자 쉬면서, 저녁먹고 배를 어루만지며 읽으면 재미난 지식 
아~그렇구나! 「잡학」

▣  전화한통이 대한청년의 꽃을 피우다

바야흐로 1896년 우리나라에도 전화가 개통되었으니~
개통 3일째 고종은 급히 인천교도소로 급히 전화한통을 겁니다.
20세 청년의 사형집행을 유보하고 지금의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라고~~
감형된 20세 청년은 교도소를 탈옥합니다.
역사적 배경을 보면, 공식적인 사형집행은 황제 보고사항입니다
20세 청년의 죄목은 일본의 사무라이를 죽인 살인죄.
식당에서 밥먹던중. 칼을 휘드루는 사무라이를 맨주먹으로 죽입니다.
「대한 국모를 살해한 놈」
이 타고난 싸움꾼~~
20세 청년의 이름은 「김 구」
전화가 없었다면 우리는 백범 김구 선생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겠죠.

[사진=pixabay]
[사진=pixabay]

▣ 자세히 다시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896년 스웨덴 통신장비업체 에릭슨은 조선 황실에 한국 최초의 전화기를 설치했습니다.

전화 개통 사흘째 되는 날 고종 황제는 이 전화기로 백범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바로 그날이 사형이 예정된 날이었는데요. 뒤늦게 ‘국모보수’라는 죄목을 발견한 고종이 전화를 건 것입니다.

당시 이름이 김창수였던 백범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을 하고 1896년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죽였습니다. 거사 3개월 뒤 해주에서 체포된 백범은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에 수감됐었습니다. 

당초 고종이 인천감리에 ‘전보’를 통해 김구선생의 사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 백범일지에 쓰인 ‘전화’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을 자료를 통해 밝히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이봉재(60) 춘천경찰서 소양로지구대 경감은 지난 1월 발간한 ‘문헌에 따른 근대통신역사’에서 “옛 문헌을 토대로 ‘1896년 10월2일에 고종이 직접 인천 감리서에 전화를 걸어 김구 선생의 사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백범일지의 기록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다”며 “항간에 고종과 인천감리 간에 이뤄진 통신수단이 ‘전보’라는 주장도 있지만 1896년 10월22일 ‘상주안건 보고’ 이후 새롭게 발굴한 각종 공적기록을 종합하면 ‘전화’로 통화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경감은 “백범일지에는 김구의 사형 정지가 고종의 전화로 인해 이뤄졌다는 얘기가 있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당시 조선에 전화가 도입돼 있지 않았을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며 “1897년 1월 22일을 전후로 한 수 많은 전화도입과 실험기록, 그리고 당시에 한성과 인천 간에 전화가 개통되어 고종과 인천감리 간에 통화가 있었다는 ‘백범일지’ 기록은 신 역사학적으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문헌에 따른 근대통신역사’에는 이 경감이 그동안 수집한 우체·,전신·전화 등 근대통신역사에 대한 자료들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 경감은 또 지난 20여년동안 발품을 팔아 수집한 통신기기 3000여점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글: 박용문 대표이사, 실전화이트해커그룹 ㈜박넥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