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지하철에서, 혼자 쉬면서, 저녁먹고 배를 어루만지며 읽으면 재미난 지식
아~그렇구나! 「잡학」

백범 김구선생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이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대한독립을 위하여 숭고한 희생을 하신 우리 동지들!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끝까지 찾아서 꼭 용산에 있는 효창공원에 안장해주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의 용산을 고집하셨을까요? 다음의 유언을 보면~

「외세의 침략 군사 주요 주둔지인 용산에 안장되어 죽어서도 외세의 침략을 우리가 막아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용산은 외세 침략국의 군사 주요 주둔지였습니다.

지리적 위치를 보면 가까운 곳 앞으로는 경복궁, 즉 왕이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왕과 정부의 주요동태를 상시 살피기가 용이했고, 도주로를 막기에도 용이했으며, 뒤로는 군사기지 운영의 주요자원인 물이 흐르는 한강이 있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외세들은 용산에 핵심 군사기지를 주둔시키는 전략을 펼쳐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군사적 주둔 지리적 조건 및 역사 때문에 외세침략국은 아니지만 주요 동맹국인 미군도 과거에 용산에 기지를 두게 되었습니다.

효창공원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효창공원의 역사는 정조가 특별히 총애했던 아들 문효세자와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를 궁궐 가까운 곳에 두고 싶어해 조성한 곳입니다. 도성 주위에 여러 후보지를 보던 중 소나무가 울창하고 한강이 보이는 언덕을 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효창공원입니다. 

정조는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좋다고 판단해 묘소를 조성하고 이곳에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의 '효창(孝昌)'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1944년 효창원이 경기도 고양(서삼릉)으로 이장되면서 이름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독립운동가 8인의 묘가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임시정부 요인 백범 김구,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4인의 유해가 안장돼 있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인 의사의 유해가 안장돼 있으며, 유해가 없는 1명의 빈뫼(허묘)가 있습니다.
  
이러한 백범 김구 유언에 따라 지금의 용산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 7인의 유해와 1인의 빈뫼(허묘)가 안장되게 되었습니다.

▣ 「백범 김구 왜? 용산을 고집하셨는가?」 에 대한 자투리 교훈!

외세의 침략으로 한번 빼앗긴 조국을 다시 되찾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하고 있는 조국, 그리고 나의 고향, 나의 집, 나라를 되찾기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하신 희생에 존경을 고합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효창공원 1명의 빈뫼(허묘)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CU♥ 「하늘의젠틀맨」

<글: 박용문 대표이사, 실전화이트해커그룹  Park's Nexus 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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