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쇼크에 더해 공급 과잉 공포까지 불거지면서 국제유가가 30% 가까이 급락했다. 사진=픽사베이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의 감산 합의 실패 영향으로 유가가 30% 가까이 폭락했다.

8일(현지시간) 오후 런던시장에서 4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장 초반 30% 가까이 폭락한 배럴당 32.05달러에 거래됐다.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가격도 배럴당 30.07달러로 27% 가까이 하락했다.

OPEC은 회원국과 비회원국이 각각 100만배럴, 50만배럴씩 추가 감산하자고 주장했지만 러시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감산이 원유 가격을 올려 상대적으로 채굴단가가 높은 미국 셰일 석유의 시장 진입을 용이하게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유 생산을 줄여 봤자 미국 셰일오일 생산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감산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판단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협상이 결렬된 이후 사우디는 4월 원유 공식 판매가격(OSP)을 기존 예상보다 큰 폭으로 인하하고 다음 달부터 원유 생산량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사우디 석유공사 아람코가 다음달부터 일일 생산량을 1000만배럴로 늘릴 계획을 세웠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이 보도대로라면 아람코의 하루 원유생산량은 40만배럴 늘어나게 돼 유가 하락은 계속될 전망이다.

사우디는 또 조만간 러시아를 압박할 정책들을 잇따라 내놓을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의 핵심 석유판매 시장인 북서유럽에 진출, 파격적인 가격할인 정책으로 러시아의 입지를 한층 약화시킨다는 전략이다.

사우디가 전쟁을 선포하자 이에 뒤질세라 알렉산더 노박 러시아 에너지 장관도 4월 1일부터 일일 생산량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맞대응에 나섰다.

OPEC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 것은 양측이 원유시장의 안정화 보다 시장점유율 확보에 더 혈안이 돼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국제유가가 배럴당 20달러대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감산 합의 무산 외에 코로나19도 석유 수요 감소를 불러 유가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수요가 급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급마저 급증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자칫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골드만삭스는 OPEC과 러시아간 석유 가격 전쟁이 시작됐다며 이번 상황은 2014년 가격 전쟁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지난 2014 ~2016년처럼 치킨게임이 전개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2014년 사우디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석유 가격전쟁으로 2016년 유가가 배럴당 28달러까지 추락한 바 있다.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의 감산협상이 불발되면서 국제유가가 가파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자료=하나금융투자

당분간 저유가 기조가 불가피하지만 치킨게임이 장기화될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나금융투자 전규연 연구원은 “매크로 여건을 고려할 때 사우디의 증산 행보는 러시아를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전략이며, OPEC은 치킨게임 장기화를 원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재정상황이 비교적 견조해 당분간 유가 하락에 따른 손해를 감당할 수 있겠지만 원유 생산을 과도하게 늘리며 적자를 지속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손익분기 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초중반 정도로 추정되며, 러시아 경제가 원자재 수출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마냥 원유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전 연구원은 “OPEC과 러시아가 재차 연합할 지는 미지수지만 이들의 생산량 증가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공급과잉에 코로나19로 인한 수요 급감까지 겹치면서 당분간 유가 하락세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많다. 
코로나 19의 팬데믹 우려가 상존하는 가운데 OPEC의 감산도 종료되며 유가 하단 지지 요인이 소멸됐다. 자료=하나금융투자

하지만 국제유가 하락이 장기화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경우 당장 생산비가 높은 미국의 셰일 생산 에너지기업이 충격을 받게 되고 채산성이 급격하게 악화하게 된다. 이 여파로 미국 셰일석유업체들이 심각한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줄도산할 위험이 높고 각국 석유기업이 무너지면 금융기관 연쇄도산 등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 2년 넘는 G2 분쟁으로 유가가 완만한 하락세를 이어가면서 미국 셰일 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됐음에도 외형 확장을 할 수 있던 배경에는 연준을 비롯한 선진국 중앙은행의 통화완화가 있다. 경기 둔화 우려에도 전반적으로 낮은 금리 덕분에 기업의 이자비용 부담은 줄었다. 

하지만 이번 유가 급락은 미국 에너지 기업의 신용에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셰일 오일 생산업체의 손익분기 유가는 지역별로 차이가 있으나 30달러에서 50달러 중반에 위치한다. 유가가 손익분기점을 하향 돌파하면서 수익성 악화가 우려된다. 

신한금융투자 하건형 연구원은 "지난 3년 넘게 진행된 외형 확장으로 취약해진 재무구조로 자금 조달 리스크까지 부상할 것"이라며 "미국 에너지 하이일드 채권 수익률은 3월 6일 기준 11%까지 상승했고 9일 유가 급락 영향까지 반영될 경우 20%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미국 셰일 오일 생산업체 손익분기 유가. 자료=신한금융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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