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3회에 걸쳐 제 1 차 산업혁명에서 제 4 차 산업혁명까지 산업혁명 전반과 우리나라의 경제 및 산업 발전 과정을 연관지어 살펴볼 계획입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게 많은 발전을 이룩한 나라입니다.

이 발전과정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겠지만 교육과 관련해서 산업발전 과정에서 인력과 인재의 필요성 등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제 4 차 산업혁명과 급속한 변화과정에 부합된 인력과 능력자를 양성하기 위한 방향을 함께 고민해보는 글로 이어갈 계획입니다.

 제1차 산업혁명은 1740~1840년 사이에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 및 발전된 혁신적인 변화를 일컫습니다. 목화솜으로부터 실을 뽑는 방적(紡績)과정과 이러한 실들로부터 가로실[위사(緯絲) : 지도에서 위치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위도가 가로줄을 나타내듯이 실을 엮어서 면직물을 만들 때 사용되는 가로줄 실을 뜻함]과 세로실[경사(經絲) : 지도에서 위치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경도가 세로줄을 나타내듯이 실을 엮어서 면직물을 만들 때 사용되는 세로줄 실을 뜻함]을 교차하여 엮어서 평면형태로 만든 옷감을 직물(織物, fabric)이라 부르는 데 이러한 방적과정과 직물을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대규모로 기계를 통해 생산해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면직물을 제작하게 된 과정이 제 1 차 산업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적으로 활용되어 전통목화솜으로부터 실을 뽑는 면방적기라고 할 수 있는 장치인 물레가 있습니다. 이는 한사람이 수동으로 손잡이를 돌려 실을 뽑는 장치로 물렛살을 돌리면서 실을 뽑기에 작업량이 제한적이며 느렸던 단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크기가 크며 수력이나 화력의 힘으로 당시로서는 고속이라고 할 수 있는 방적기를 활용하여 면직물을 대규모로 생산해내는 것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그림1.  물레의 구조(출처 :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liyean)]
[그림2. 당시의 영국 목화 방직기(출처. 조선 멤버스)]
[그림2. 당시의 영국 목화 방직기(출처: 조선 멤버스)]

이 과정에서 영국의 능숙한 방직 수공업자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직공장의 기술자로 취직을 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농업을 포기하고 공업현장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때가 조선 실학자들이 실학사상이 대두되는 시기이긴 했지만 상업이 천대받는 상황에 농업도 농사에 편중되어 있던 산업구조였기에 면직물의 생산은 개인의 자급자족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런 급작스런 과정에서 방적기와 방직기의 동력으로 증기기관이 활용되면서 대규모로 면직물 생산이 이루어져 유럽중심의 서양에서는 면직물의 일반화가 가속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흔히 증기기관의 발명이 제임스 와트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증기기관의 최초 발명은 1712년 영국의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 1663~1729)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때의 증기기관은 기존의 화력 기관이 규모가 크고 구조가 복잡하며 이 기관을 식히기 위해 강가 등에 위치해야 하는 제한적인 여건에서 벗어나서 간단하며 증기를 활용하므로 굳이 강가에 설치하지 않고 도심에서도 활용가능한 구조로 변형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구조로 변형하게 만든 발명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였습니다.

1765년 보다 진보된 증기기관으로 개량하였으며 이를 방직기에만 활용하지 않고, 당시에 난제라고 알려져 있던 탄광내의 물을 퍼내는 펌프 뿐만 아니라 교통수단의 동력원으로 업그레이드를 한 기술자였습니다. 이렇게 제임스 와트의 업그레이드로 인해 공장의 위치가 강가일 필요가 없어졌으며 탄광 등에서 채굴한 석탄이나 광산에서 채굴한 철광석 등의 산업 자재들을 먼 곳까지 실어나르게 되므로써 운송 수단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공장주들과 자본가가 부를 축적하게 되었으며 자본주의 탄생과 더불어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산주의 이론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무렵 우리나라는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정치적으로 청나라의 영향속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독자적인 과학과 기술의 변화를 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1636년(인조4년) 병자호란 패전의 결과로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1637년 2월에 청나라에 세자빈과 함께 볼모로 가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盛京, 오늘날의 선양(瀋陽)]에서 지내다가 1644년 명나라의 수도였던 북경(北京, 베이징)이 함락된 후 가을부터 총 9년 동안 억류상태로 지내다가 1645년 2월에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에서 인질로 있는 동안 소현세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창구 역할을 병행하였습니다. 독일의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적, 성모 마리아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西學)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1645년 2월에 조선으로 귀환한 후 4월 26일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갑자기 죽기까지 청나라에서의 활동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우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후 조선은 철학적으로는 ‘성리학적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에 빠져서 붕당정치 속에서 정권획득에 몰입된 양반들과 개혁 시도가 섞인 혼란의 시간들이었습니다. 허학이라고 바라본 성리학적 공리공론을 벗어나고자 반대기치를 걸고 ‘실제로 활용가능한 참된 학문’이란 의미의 실학(實學)사상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은 청나라를 통해서 많은 다양한 서양지식과 서양문물(줄여서 서학이라고 함)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국가 정책에 반영되게 할 수 있는 주축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반계수록(磻溪隧錄)으로 유명한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토지개혁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정치중심으로 삼고 농업생산력 향상에 기여했습니다. 현실에 적용가능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의 사고를 가졌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습니다. 동시에 사물과 사람의 이치는 같지 않다고 생각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같은 사상에 대해 비판하였으며 천문학·의학·수학 등 자연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성호 이익(李瀷, 1681년(숙종 7)~1763년(영조 39)) 은 유형원의 외6촌 동생이었으며 유형원과 같이 농사의 효율성에 집중한 정치가이자 철학자이면서 교육자였습니다. 영조 임금의 부탁을 뿌리치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써서 안정복이 동서각목을 쓰는데 자료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택리지를 쓴 이중환, 체제공, 정약용 등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들에게 역사 뿐만 아니라 지리, 환경, 동식물, 서학(=서양학문) 등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조대왕 때 수원성 축조에 거중기를 활용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792년(정조 16년) 정조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알려진 기기도설(奇器圖說 : 1627년 북경에서 처음 출간된 스위스인 선교사 J. 테렌츠가 쓴 책)에 실린 그림을 보고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하여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사용된 '거중기'를 발명하였습니다. 또 오늘날의 크레인과 유사하지만 고정된 위치에서 무거운 돌 등을 들어올리는데 사용된 '녹로'를 발명하여 수원성 축조에 이용하였습니다. 이밖에 한강에서 작은 배들을 나란하게 연결하여 사람과 마차 등이 이동할 수 있게 하는 '배다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림 3. 거중기(출처 : http://study.zum.com/book/12161)
그림 3. 거중기(출처 : http://study.zum.com/book/12161)
그림 4. 녹로(출처 : 위키피디아)
그림 4. 녹로(출처 : 위키피디아)

서양의 지동설에 해당하는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중국에서 서양 문물에 대한 자료들을 공부한 후 열하일기를 통해 수레나 선박의 이용과 화폐의 활용성 등을 제시했습니다.

지전설과 함께 혼천의를 발명한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청나라에서 망원경을 통해 태양을 관찰하고, 다양한 천문 기구의 제작법과 사용법 등을 익혔습니다. 천문, 역법(曆法) 등을 공부하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가졌으며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낮과 밤의 원리를 이해했습니다. 

 이 실학자들이 중앙 정계에서 상당한 위치까지 올라서 우리나라 백성들이 잘살 수 있는 공업과 상업 발전에 기여했더라면 우리나라도 부유하고 강한 나라로 탈바꿈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시대에는 평민들로부터 과학이나 기술을 바탕으로 상업이 활성화되는 구조가 아니고 국가나 왕이 주도하여 과학, 기술의 변화를 꾀하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도한 왕이 죽거나 주도한 세력이 몰락하게되면 해당하는 과학적 토대나 기술 심지어 발명품이 전해지지 않는 과학과 기술이 단절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철학적 무장을 한 다양한 융합적 사고를 가진 인재가 많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받고 지나친 학문적인 기반보다는 좀 더 실생활에 접목가능한 인재양성과 발굴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제 2 차 산업혁명(1880~1920년)에 대한 리뷰와 함께 우리나라의 암울했던 동시대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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