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성벽, 서산 해미읍성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의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서 감무(조선시대 왕의 친림하에 거행된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대회)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지역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합한 장소라 판단하여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해미로 이전하고 해미에 충청지역 육군의 최고 지휘기관인 충청병영이 위치하며 병마절도사가 배치된다.

이후 충청도 5진영중 하나인 호서좌영이 들어서게 되고 영장(營張)으로 무장을 파견해 호서좌영장과 해미현감을 겸직하게 하면서 읍성(지방의 관청과 사람들이 사는 곳을 둘러 쌓은 성으로 읍이라는 말은 성으로 둘러 쌓인 마을을 의미한다. 읍성은 평시에는 행정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된다.)이 되었다.

이곳은 정해(貞海여미(餘美) 두 현을 합한 지명이다. 정해현은 고려 태조 때 몽웅현(夢熊縣)의 아전 한씨(韓氏)가 큰 공로가 있어 대광(大匡)의 작호를 내리고 홍주(洪州)의 속현이었던 고구현(高丘縣)을 분할하여 정해현으로 만들어서 그의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1018(현종 9)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여미현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이었는데, 757(경덕왕 16) 여읍(餘邑)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다시 여미라 고쳤으며, 1018년 운주에 붙였고, 1106(예종 1)에 감무를 두었다.  1407(태종 7) 정해·여미 두 현을 합하여 해미로 고치고 정해를 그 치소로 삼았고, 1413년 현감을 두었다. 1895(고종 32) ()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서산군에 병합, 1917년 해미면이 되었다. 1995년에는 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되어 서산시가 되었다.

해미읍성의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으로 이 성의 축조를 지시한 사람은 조선 세 번째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은 즉위한지 16년이 되던 해에 왜구에 대한 방비책의 하나로 지금의 서산지역에 해미내상성을 쌓도록 지시했다. 성곽의 길이만 1800m이며 성벽의 높이는 5m인 해미내상상은 성벽 안쪽의 면적은 2만여 평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곳은 약 850명의 조선군이 주둔했으며 군사의 통제를 위한 지휘소 역할을 했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충무공 이순신이 충청병사 군관으로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성곽을 구성하고 있는 성곽의 축에는 청주, 충주, 상주, 연산 등 다양한 지역이 새겨져 있는 점을 보면 해미내상성을 축조할 당시 전국에서 인력을 차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230년간 종2품의 벼슬인 병마절도사가 주둔해 있으며 군사적 요충지의 의무를 다했다. 후에 병마절도사의 주둔지가 청주로 바뀌고 그 자리에 해미현 관아가 옮겨오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해미읍성 진남문.  읍성의 남쪽으로 통하는 성의 정문으로 500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성 안쪽에 보면 문루 아래를 가로지른 받침돌 중앙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皇明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년 (성종 22년)에 진남문이 중수(重修)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Photo by 최영규
해미읍성 진남문. 읍성의 남쪽으로 통하는 성의 정문으로 500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성 안쪽에 보면 문루 아래를 가로지른 받침돌 중앙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皇明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년 (성종 22년)에 진남문이 중수(重修)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Photo by 최영규

 

해미읍성의 정문이면서 남문이기도 한 진남문을 들어서면 탁 트인 넓은 평지와 함께 곳곳에 최근 복원된 조선시대 건물들이 눈에 띈다. 성 가운데 높다란 언덕에 오르면 청허정으로 불리는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태안 앞바다는 물론 날씨에 따라 안면도를 넘어 서해가 보일 정도로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한다.

청허정 앞 청정한 비경에 감탄하다가 뒤편을 보게 되면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뒤편에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에 관계없이 푸름을 간직하는 소나무 숲 사이로 만들어진 산책로는 해미읍성만이 가진 특별한 볼거리이다.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총포류들. 신기전기화차, 검차, 천자총통, 대장군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Photo by 최영규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총포류들. 신기전기화차, 검차, 천자총통, 대장군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Photo by 최영규

해미읍성의 축성 배경과 숲이 만들어진 역사적 이유까지 더해진다면 서해안 최고의 볼거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조선시대 군사적 요충지였던 해미읍성은 성 자체적으로 전투에 사용하는 무기와 말과 마차, 장비 등을 조달하던 보급창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 안에서 자랐던 여러 나무들은 마차와 무기로 제작되었고 송진은 화약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거 기록에는 해미읍성은 소나무와 함께 대나무 역시 숲을 이룰 정도라는 기록이 있다.

곧게 자란 대나무를 잘라 활과 화살을 만들고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 때 보조 재료로 사용하는 등 전시에 대비해 많은 무기를 성안에서 자급자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읍성은 지방 행정 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평시에는 행정의 중심지가 되고 전시는 방어의 중심지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호서좌영. 절제사가 근무하던 동헌에 삼문과 누각이 있다. 일반적으로 관찰사나 절제사들이 근무하던 지역의 동헌에만 이런 출입문이있다. Photo by 최영규
호서좌영. 절제사가 근무하던 동헌에 삼문과 누각이 있다. 일반적으로 관찰사나 절제사들이 근무하던 지역의 동헌에만 이런 출입문이 있다. Photo by 최영규

 

동헌(東軒).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를 보던 중심건물이다. 관찰사, 수령들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Photo by 최영규
동헌(東軒).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를 보던 중심건물이다. 관찰사, 수령들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Photo by 최영규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헌감경영장의 집무실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헌감경영장의 집무실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가는길

 

1. 서울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로 가는길

1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주말은 더 걸림). 서울에서 120~140km 정도.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해미IC까지 간다음 5분정도면 서산 해미읍성이 나온다.

2. 경부고속도로 서울출발인 경우에는 평택제천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해미IC까지 간다음 5분정도면 서산 해미읍성이 나온다.

3. 경부고속도로 부산 출발인 경우에는 당진 영덕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해미IC까지 간다음 5분정도면 서산 해미읍성이 나온다.

 

먹거리

백종원의 골목식당 참조. https://sequanus.tistory.com/263

 

주위 경관

1. 부석사

2. 수덕사 

3. 안면도 자연휴양림

4. 외암 민속마을

5. 꽃지해수욕장

 

 

자료출처

1.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dlpan_i/221216182027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2583200421

3. 충청남도지(忠淸南道誌) (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1979)

4. 한국지명총람 (한글학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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