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모랄리스트이자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프랑스 소설가

272.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 [ Émile François Zola , Emile Zola ]

 

Place Alfred Dreyfus에 있는 에밀 졸라 기념비. 이 기념비는 파리 15구 Av. Emile Zola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 최영규
Place Alfred Dreyfus에 있는 에밀 졸라 기념비. 이 기념비는 파리 15구 Av. Emile Zola에 위치하고 있다. 사진=최영규

 

프랑스 문호 에밀 졸라는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모랄리스트이면서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 그 때문에 만년에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사건이 일어나자 사이비 애국자들에게 항거하고 군부의 부당성을 공격하였으며 끝까지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의 무죄를 주장하여 결국 승리하였다. 대통령에게 보낸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공개장 [나는 고발한다](1898)는 유명하다.

에밀 졸라가 1898113<로로르(여명)문학신문(黎明, L’AUROR)>지에 발표한 격문 나는 고발한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졸라는 이 격문을 통해 독일 간첩누명을 쓰고 투옥됐던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임을 격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처음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란 제목으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로로르>지의 편집장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J’Accuse !) ’로 바꿀 것을 권했다. 1면에 나는 고발한다!’를 실은 <로로르>는 몇 시간 만에 30만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아나톨 프랑스, 에밀 뒤르켐, 마르셀 프루스트, 클로드 모네 등 예술가 과학자 교수들이 드레퓌스 사건 재심 청원서에 서명했다. 드레퓌스 재심 운동은 다시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졸라는 당대 최고 인기 작가이자 대문호로 칭송 받았지만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뒤 엄청난 고난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이 글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퍼져있던 프랑스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대중들의 심리를 반영한 듯 프랑스 의회는 서둘러 졸라를 기소하기로 결정했다. 18987월 베르사유 중죄재판소는 졸라에게 징역 1년에 벌금 3000 프랑을 선고했다. 그리고 선고 당일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선고 며칠 후 프랑스 정부는 그의 레지옹 도뇌르 수훈자 자격도 박탈했다. 이후 18996월 졸라는 영국에서 돌아왔으나, 불과 3년 뒤인 1902930일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했다.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진실을 쓰기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한 채였다.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는 졸라가 사망한지 4년이 더 지난 1906713일 복권됐다.

졸라 문학의 핵심이랄 수 있는 <루공마카르> 총서는 1871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했다. 모두 20권이 출간된 <루공마카르> 총서 중에서 <목로주점>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졸라는 유명 작가로 자리잡는다. 이어 출간된 <나나> <제르미날> 등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졸라는 당대 최고 인기 작가가 된다.

졸라는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주자로 평가 받는다. 샤토브리앙, 위고,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등과 함께 19세기 프랑스 소설 시대를 연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이른바 소설의 시대라 불리는 19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우리가 로망(roman)’ 이라고 부르는 장편소설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이기도 하다.

 

자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66867&cid=59014&categoryId=59014

아시아 기자협회

http://kor.theasian.asia/archives/283811

 

저작권자 © 자투리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