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회 천안, 독립기념관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에 대해 새긴 비석.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서기 414(장수왕 3)에 아버지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능묘 곁에 세운 비석이다. 중국 지린성 퉁거우에 있다. 내용은 고구려 왕실의 연원에 대한 수사,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왕릉의 수묘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규정이다.

당연하지만, 당시 고구려인들이 이 비석을 어떻게 불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당대(391)에 제조된 호태왕 방울을 보면 광개토왕의 치세기인 당대에도 광개토왕을 호태왕으로 불렀으므로 호태왕릉비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독립기념관, 천안. 사진=  최영규
광개토대왕릉비. 독립기념관, 천안.                                                           사진= 최영규

 

 

천안 독립기념관에 제작되어 있는 이 비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석질, 형태, 글씨로 제작된 것이다. 높이 6.39미터에 무개 38톤에 이르는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크고 높다. 4면에 새겨진 1802자의 비문은 고구려의 건국사실과 왕위계승, 광개토대왕의 정벌활동, 그리고 왕릉을 지키는 제도와 유훈이 담겨 있어서, 한국 고대 고구려의 웅장한 역사를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이 건립사업은 재단법인 계룡장학재단 이인구 이사장의 큰 뜻과 지원으로 이루어졌다.(20041026, 독립기념관장)

고구려 멸망 이후인 남북국시대에 이 비석을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아예 국경 바깥에 위치하게 되어 정체가 잊혔다. 그 시대 사람들도 압록강가, 현대의 지안시 근처에 큰 석비가 있다는건 알긴 했지만, 내용은 모르고 그저 옛 금나라 황제의 비 정도로 여겼다. 현지 농민들은 한문을 해석할 지식이 없었고 지식인 계층은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이런 변방까지 올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청나라 말기에 점차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되고 이 비문이 발견되어 고구려 왕의 비문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광개토대왕릉비.  독립기념관, 천안. 4면에 새겨진 1802자의 비문은 고구려의 건국사실과 왕위계승, 광개토대왕의 정벌활동, 그리고 왕릉을 지키는 제도와 유훈이 담겨 있다. (4면중 1면)사진=  최영규
광개토대왕릉비. 독립기념관, 천안. 4면에 새겨진 1802자의 비문은 고구려의 건국사실과 왕위계승, 광개토대왕의 정벌활동, 그리고 왕릉을 지키는 제도와 유훈이 담겨 있다.
(4면중 1면)                                                                사진= 최영규

 

자료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4%91%EA%B0%9C%ED%86%A0%EB%8C%80%EC%99%95%EB%A6%89%EB%B9%8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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