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실학자·서화가

88. 김정희(金正喜) 선생 고택과 기념관

 

조선 후기의 실학자·고증학자·서예가·역사학자·금석학자이다. 추사체라는 글씨나 금석문의 대가 정도로 많이 알려졌으나 후학도 많고 관직에도 나가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으로 사용되고 있다.

 

추사 고택.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칸씩 건립비용을 분담하여 지었다고 한다. 사진=  최영규
추사 고택.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칸씩 건립비용을 분담하여 지었다고 한다.                                                                      사진= 최영규

 

본관은 노론 벽파 명가인 경주 김씨로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증손주인데 화순옹주는 자식이 없었고 김정희의 조부가 양자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직접 피가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와는 먼 친척뻘인데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정순왕후의 7촌 숙부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1819(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 체계를 탈피하여 신 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巨擘)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考證學風)을 도입하여 학문 으로는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문자학(文字學), 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 천문학(天文學)에 이르기까지 박통(博通)하였고,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추사고택은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이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金漢藎)께서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선생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추사고택은 문간채와 사랑채 그리고 안채, 사당채가 있다.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으며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선생의 아들인 상우(商佑)가 추사체로 쓴 것을 각자(刻字)한 것이다.

 

추사 고택 안채.      사진=  최영규
추사 고택 안채.                                                                사진= 최영규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해시계 받침 용도의 돌기둥.사진=  최영규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해시계 받침 용도의 돌기둥.          사진= 최영규

 

 

추사 김정희의 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    추사 김정희, 초배(初配)인 한산 이씨, 계배(繼配)인 예안이씨가 합장되어 있다.  묘에는 석상과 망주석 1쌍이 있고 묘비는 1937년 9월에 세웠는데 종인(宗人) 김승렬(金承烈)이 짓고 썼다.  사진=  최영규
추사 김정희의 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 추사 김정희, 초배(初配)인 한산 이씨, 계배(繼配)인 예안이씨가 합장되어 있다. 묘에는 석상과 망주석 1쌍이 있고 묘비는 1937년 9월에 세웠는데 종인(宗人) 김승렬(金承烈)이 짓고 썼다.                                                            사진= 최영규

 

김정희의 세한도.  세한도는 1844년 완당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이다. 사진= 나무위키에서 인용
김정희의 세한도. 세한도는 1844년 완당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이다.                                      사진= 나무위키에서 인용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시절 겨울철 소나무를 그렸는데 그것이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이다. 이 그림은 김정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을 구해와 유배지까지 찾아와서 갖다준 것에 감명해 그려준 그림이라고 전한다. 사실 그림을 보면 원근법도 맞지 않아서 잘 그렸다고 볼 수는 없는 그림이지만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하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한 것.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김정희 미술관인 추사관 건물은 <세한도>의 건물을 본따서 만들었다. <세한도>에 얽힌 일화가 있는데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흘러흘러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 매니아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고 3달 뒤인 1945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하겠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매우 귀하게 여겼으나 정치에 입문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쩔 수 없이 이를 매각했다고 한다. 현재는 당시 이를 매입했던 개성 출신의 부호이자 고미술 수집가였던 손세기의 아들 손창근이 물려받아 소장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예산 추사 기념관.  추사 기념관은 추사 김정희선생의 드높은 서예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여 추사선생의 다양한 면모와 그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2008년에 건립되었다.사진=  최영규
예산 추사 기념관. 추사 기념관은 추사 김정희선생의 드높은 서예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여 추사선생의 다양한 면모와 그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2008년에 건립되었다.                                                             사진= 최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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